“오직 은혜”에도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남편이 사업이 망하고 신용불량자가 된 후부터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힘써 봤자 모든 것은 주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내에게 믿음이 없다고 야단을 치며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라고 한답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라 하셨으니 우리는 전혀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은 천막을 만들어 생활비를 조달하면서 사명을 감당했으며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 3: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안식일에 쉴 것을 명하신 하나님은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동행일기를 쓰자”고 하면 “그렇게 노력해야 주님과 친밀해지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면서 어떻게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할 수 있을까?’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구원도, 주님과의 친밀함도 ‘오직 은혜’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고 주님과 친밀해지고, 육신을 이기려고 노력해서는 안되지만 주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 주님의 생명을 사는 자가 되었으니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라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 안에 임하셨지만 저절로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내게 붙어있으라” 말씀하셨을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절로 주님 안에 거해진다면 “내 안에 거하라” 말씀하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이고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바깥에 버려져 마르나니”라는 말씀도 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은 주님이 알아서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고 여전히 ‘오직 은혜’로 살지만, 우리에게 경건의 삶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세 살짜리 아이가 있는 한 부부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부모가 "이리와!" 하였을 때 그 아이는 반대편 방향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런데도 그 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는 "허허, 아주 귀엽죠?" 라고만 말하였습니다. 하루는 그 소녀가 앞마당에서 놀고 있었는데, 차가 오는 것을 본 엄마가 "얘야, 이리 와!"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아이는 웃으면서 막 달려오는 차 앞으로 뛰어들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그 목사님이 처음으로 인도한 장례식이었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푸른 초장에서 뒹굴고 잔잔한 시냇가에서 물장구만 치며 사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염려하지는 않지만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에 큰 오해가 있습니다.
자신이 죽었으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믿음은 ‘예수로 산다’는 믿음으로 이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기에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옛사람은 이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순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은 댓가를 얻기 위한 수고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사는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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